교육기관납품전문더조은 메인

산모용미역으로 좋은 자연산 다릿돌미역 > 자유게시판

이벤트상품
  • 이벤트 상품 없음
Q menu
오늘본상품

오늘본상품 없음

TOP
DOWN

산모용미역으로 좋은 자연산 다릿돌미역

페이지 정보

작성자 Jerome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4-08-24 02:08

본문

부산고구려$ -차례- Ⅰ. 머리말 Ⅱ. 가루베의 공주에서의 유적 조사1. 조선총독부의 공주 송산리고분 조사 2. 조선총독부 조사에 앞선 가루베의 조사3. 송산리 제5호분과 제8호분 발굴4. 가루베의 공주 송산리 제6호분 도굴 Ⅲ. 가루베가 일본으로 반출한 유물1. 송산리 제6호분 출토유물의 행방과 아이즈 야이치(會津八一)기념박물관에 들어간 가루베 수집품2. 도쿄국립박물관에 들어간 가루베 반출 유물3. 기타 가루베가 반출한 백제유물 ​ Ⅳ. 가루베의 반출 유물에 대한 환수 노력 Ⅴ. 맺음말 Ⅰ. 머리말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은 일본 와세다대학 국한과(國漢科)를 졸업하고, 일본 문화의 연원(淵源)을 연구하겠다는 일념으로, 1925년 3월에 한국에 건너와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서 고대사 강좌를 맡았다. 그의 포부는 평양 일대에 산재한 낙랑 및 고구려 유적을 연구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평양은 이미 1909년 이래 도쿄대 관계자들이 중심이 되어 낙랑 및 고구려 유적 조사로 인해 상당한 연구 성과를 이루고 있었다. 그가 평양에서 교직생활을 할 즈음에는 낙랑고분의 대난굴 시대로 도굴품들이 시중에 마구 쏟아져 평양의 유지, 수집가들은 그 수집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1925년 도쿄제국대학에서 왕우묘를 발굴하여 몽땅 그네들 대학으로 반출하여 보고서를 발간하는 등 낙랑 유적의 명성이 최고조에 달해있을 시기였다.① 따라서 낙랑 유적 유물에 대한 연구열과 연구자가 많았던 시기인지라 젊은 그로서는 연구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니 여간 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참에 지인으로부터 백제문화 연구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낙랑이나 고구려 유적 조사에 비하면 백제 유적의 조사는 1915년 구로이타(黑板)와 세키노(關野)에 의한 부여 능산리고분의 일부 조사와 1917년 야쓰이(谷井)의 부여 능산리고분 조사 정도에 그치고 있어, 백제문화에 대한 연구는 가루베로서 구미가 당기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숭실전문학교 교수의 직을 버리고 1927년 1월에 공주로 내려갔다. 이때부터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근무하면서 백제 유적 연구에 몰두했다. 공주고보에서 교편을 잡은 가루베는 일본어와 한문을 가르치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생도들을 이끌고 산야를 다니며 유적을 답사하고 기와조각 등을 채집하여 ‘와선생(瓦先生)’이란 별칭을 얻기도 했다.②가루베의 유물수집 또는 조사 착수는 학생들에게 과제를 주고, 학생들이 조사한 지역의 전설, 고적, 유물 등에 대한 정보를 참고하여 직접 현지 조사에 착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35년에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 간행한 『충남향토지(忠南鄕土誌)』를 보면 그러한 흔적을 볼 수 있다.③ 가루베는 1930년 3월에 교내에 향토관을 설치하고 “거교적으로 공주를 중심으로 한 백제시대의 토기, 와당, 탁본, 사진, 기타 향토의 훈풍을 담은 여러 가지 유물 수집에 힘썼다.”고 한다.④ 윤용혁이 『가루베 지온의 백제연구』⑤에서 제시한 ‘가루베 지온 수집 유물에 의한 공주고보 향토실’ 사진을 보면 각종 수집유물이 잘 정리되어 진열되어 있다.가루베는 공주고보에 재직하면서 그가 공주일대에서 연구한 백제 유적에 대한 연구 성과를 『고고학잡지』에 1929년부터 1936년까지 게재하기도 했다.일제강점기에 가루베 만큼 집착적으로 백제유적 연구를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가루베는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원은 아니나 개인적으로 학술연구라는 미명하에 공주 일대를 샅샅이 훑으면서 총독부의 정식 허가도 없이 백제의 고분을 수없이 파헤쳤다. 공주 일대의 고분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고분이 없을 정도라 할 수 있다. 가루베가 1929년부터 1933년까지 공주일대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한 고분의 수는 1,000여 기나 되었다. 상당수는 그가 최초로 조사 내지는 발굴을 하였다. 물론 대부분은 도굴이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그의 소장품들은 지표상에서 채집한 것도 있지만 상당수는 고분에서 출토된 고고유물로서 은밀히 소장한 것이기 때문에 들어난 것이 드물 뿐만 아니라 그 대부분은 일본으로 반출했다.본 내용은 가루베의 공주를 중심으로 한 유적조사에 따른 유물 반출과 그의 불법 행위를 중심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① 1925년까지 낙랑 및 고구려 유적 조사를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1902년 關野貞의 평양 답사1909년 10월 關野貞 일행의 평양 석암리고분 조사1909년 11월 동경대 萩野由之, 今西龍의 낙랑고분 조사1910년 10월 關野貞 일행의 대동강면 고분 조사1911년 7월~10월 鳥居龍藏, 小杉彦治(조선총독부 학무국 사무관)의 함북 유적지 조사1911년 9월 ~10월 關野貞 일행의 황해도, 평양 일대 고분 조사1912년 9월 關野貞 일행의 황해도 일대 고분 조사1912년 末松熊彦의 고구려벽화 조사 1912년 10월~1913년 3월 鳥居龍藏의 평안북도 및 만주일대의 유적 조사1913년 9월~10월 關野貞 일행의 만주일대 및 평남일대 유적 조사1914년 가을 谷井濟一의 평남 고분 조사1915년 6월 八木奘三郞의 황해도 도요지 조사1916년 3월 谷井濟一의 평남 만달산 고분 조사1916년 8월~9월 黑坂勝美의 평안남북도 유적 조사1916년 9월~10월 關野貞 일행의 평남일대의 대대적 고분 조사1917년 5월~7월 關野貞 일행의 황해도, 평안남북도 일대 고분 조사1918년 7월, 9월 谷井濟一의 황해도 고분 조사 1918년 6월 黑板勝美의 만주일대 유적 조사1919년 9월~11월 池內宏 등의 함경남도 함흥군일대의 산성 조사1921년 關野貞의 평양토성 조사1924년 10월 小場恒吉 등의 평양 대동강면 고분 조사1925년 10월~12월 原田淑人 등의 평양 대동강면 고분 조사(참고: 정규홍, 『우리 문화재 반출사』, 2012)② 小野眞一, 「輕部慈恩先生の死を悼む」, 『(月刊)考古學ジヤーナル』 51호, 1970년 12월.③ 『忠南鄕土誌』는 전설편, 향토사편, 토속자료편으로 나누고 전설편과 향토사편은 각 군별로 배열하고 각 지역의 고적 유물에 관한 것을 싣고 있다. 토속자료편은 풍속 관습, 민간신앙, 연중행사, 오락 유희, 가요의 5부로 나누어 게재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내용은 학생들이 조사한 내용들이다. 전설편의 앞부분에 輕部慈恩의 「公州に於ける百濟遺蹟」을 싣고 있는데, 1934년 11월 『朝鮮』에 게재했던 것을 『忠南鄕土誌』에 그대로 게재하고 있다.④ 윤용혁, 『가루베 지온의 백제연구』, 서경문화사, 2010.“私藏과 蒸發이라는 유물의 문제를 논외로 한다면, 가루베 지온은 공주라는 공간을 학문적 토대로 한 최초의 근대학자다.”-책머리.⑤ 윤용혁의 저서 『가루베 지온의 백제연구』는 자료적으로도 폭넓게 수집한 풍부한 량일 뿐만 아니라, 가루베가 범한 과오와 그가 남긴 개인적 실적을 객관적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가루베를 평가할 수 있는 좋은 참고서라 할 수 있다. ​ Ⅱ. 가루베의 공주에서의 유적 조사 1. 조선총독부의 공주 송산리고분 조사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1927년 3월경에 도굴되어, 1927년 4월 공주군 보승회장 다카야마(高山)가 백제유적의 소개와 아울러 지방 발전책으로 이 고분의 성질을 밝히기 위해 총독부에 조사를 요청해 왔다.① 이에 따라 공주 학봉리 도요지를 조사하던 조선총독부 촉탁 노모리 겐(野守健)과 고원 간다 소죠(神田惣蔵)가 이곳에 출장을 하여 1927년 10월 13일부터 23일까지 공주 송산리(주외면 용당리) 소재 고분을 발굴 조사했다.송산리 고분 조사의 정식보고서는 1935년에 발행한 「공주 송산리 고분 조사보고」(『쇼와(昭和)2년도 고적조사보고 제2책』)이 있고, 이에 앞서 작성한 총독부박물관 공문서 ‘쇼와(昭和) 2~4년도 복명서’철에 「공주 용당리 고분 발굴 조사」②가 있다.③ 복명서에는 발굴 배경, 고분의 위치 및 현황, 구조, 발굴품 등이 기재되어 있다. 관련 도면이 첨부되어 있다. 제출 일자는 명확하지 않다. 송산리고분 배치도(野守健의 복명서) 송산리고분 배치도(輕部慈恩, 『考古學雜誌』 제23권 제9호) 공주군 주외면 송산리에 속하는 한 구릉에 5기의 고분이 동서로 병렬해 있는데 제1호분부터 제5호분까지 명명했다.1927년에 노모리 겐(野守健)과 고원 간다 소죠(神田惣蔵)가 조사한 고분은 오늘날 1~4호분으로 구분된 것들과 파괴분을 포함한 5기이다. 즉 1927년 5호분으로 구분된 것을 다시 1호분으로 보면서 가장 서쪽에 있는 것을 4호분으로 분류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현존 송산리 고분의 현황을 부산고구려$ 토대로 1927년에 조사된 5기의 고분을 서쪽부터 1~5호분으로 분류하였다면 4호분은 당시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④ 제1호분은 동서 5기의 병렬 고분 중 가장 서단(西端)에 있는 것으로 당시에는 1호분으로 명명되었으나 현재 4호분으로 명명된 것이다.제4호분(보고서 제1호분)은 봉토가 거의 유실되어 분형만 겨우 남아 있었다. 내부의 현실 천정과 벽에는 칠식의 흔적이 있었다. 내부에서 철정 5개를 발견했다. 1927년 3월경 지역민이 천정을 파괴하고 내부로 들어가 유존한 명기(明器)의 잔편을 훔쳐갔다고 하며 내부에서는 부장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겨우 사자의 허리부분에 해당하는 곳에서 은제투조대과(銀製透彫帶銙) 2매, 족부에 해당하는 곳에서 철도병두편(鐵刀柄頭片), 목관의 장식용 두부도금식정(頭部鍍金飾釘)을 발견했다. 도굴공의 근처에서 오사카아사히신문지(大阪朝日新聞紙) 조각과 양초가 발견되고 도굴자가 유실한 것으로 보이는 철제창두 1본, 철족 수본을 발견했다. 그 외 제1호 고분에서 발견 유물은 순금제동장금구(純金製胴張金具) 2개, 금동제영락(金銅製瓔珞) 12개, 금동장식금구잔결(金銅裝飾金具殘缺) 1개, 금동금구잔결(金銅金具殘缺) 1개, 철지금장금구잔결(鐵地金張金具殘缺) 2개, 식정(飾釘) 98개, 기타 약간이 발견되었다. 이 고분은 “종래 경기도 광주 지방, 부여 지방에서 조사한 백제고분 현실과 상위(相違)한 것으로 장래 연구를 위해 보존의 필요가 있다”고 하고 있다.⑤제3호분(보고서 제2호분)은 제4호분의 동쪽에 접해 있는 것으로, 1927년 당시에는 제2호분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이후 가루베 지온에 의해 재3호분으로 재분류되고 무령왕릉 조사보고서에도 제3호분으로 표시되어 있는 고분이다.⑥ 봉토가 역시 유출되어 겨우 분형(墳形)을 알 수 있을 정도인데 “정상부에 가까운 서남측에 도굴공이 있어 현실의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본 분은 전자와 동시에 도굴을 하고 다시 최근에 도굴을 한 것 같았다”⑦고 하는 것으로 보아 동일범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3호분(보고서 제2호분)은 도굴공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 바닥 일부를 조사하고 금동제금구잔결 1개, 금동제과대금구 개, 금동제식금구 2개, 식정 132개, 철지금동장행엽잔결 1개, 은제식금구 1개, 기타 약간을 발견했다.⑧총독부의 명에 의한 노모리 등의 조사에서 제1호분(보고서 제5호)은 현재 외형으로 정비되어 있는 고분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으로 1927년 확인된 고분 중 4호 또는 5호분 중의 하나로 추정되나 그 구체적인 내용 파악이 어렵다.⑨ 1927년에 명명한 송산리 5호분(현 1호분)의 경우에는 현실 천정이 이미 무너져 내부에는 토사가 가득 차 있었으며 “본 고분 역시 옛날에 도굴 파괴되어 귀중한 부장품은 이미 훔쳐 가버렸다”고 하며 다행히 이곳에서 도제감 2개 유리소옥 27개, 금동제교구 1개, 금동제수하금구 1개, 금동제식금구잔결 1개, 유리소옥 27개, 연옥 269개, 도자(刀子) 1개, 도기파편 2개, 기타 약간을 발견했다.⑩ 복명서에는 고분 및 출토 유물 사진과 도면을 상당수 첨부한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어떻게 된 것인지 모두가 누락되어 있다.⑪제4호분(보고서 제1호분)으로부터 1927년 3월경 지방민의 도굴로 구옥, 유리옥, 검, 부 등이 출토되어 공주읍내의 일본인이 소지하고 있고, 제3호분(보고서 제2호분)으로부터 금제이식 1대가 발견되어 이것은 현재 교토제국대학의 기요노(淸野) 박사의 소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⑫ 2. 조선총독부 조사에 앞선 가루베의 조사 송산리고분군(1~4호분)에 대한 노모리 등의 조사는 1927년 10월에 있었으나 이보다 훨씬 앞서 가루베의 1차 조사가 있었다. 이는 그가 공주고보에 재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27년 3월의 일이다. 『충남향토지(忠南鄕土誌)』에 기고(寄稿)한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의 글에, 나는 공주를 중심으로 이 일대(一帶)의 산악, 구릉 등을 수색하여 조사한 결과 쇼와(昭和)2년(1927) 3월에 공주읍의 서북에 접속(接續)한 송산리의 구릉지대(丘陵地帶)에서 제1호분에서 제4호분까지 4기를 발견하였고, 계속하여 공주읍을 중심으로 그 주위의 산구(山丘)에 한하여 다수의 백제분묘를 발견했다. 이미 도굴을 당하여 곽(槨)의 일부만 약간 남아 대부분 파괴된 것이 많았다. 여러 차례 나는 『고고학잡지』 등에 조사결과를 보고하였다.⑬ ​고 하고 있다.가루베는 1930년 5월에 『고고학잡지』에 「낙랑 영향을 받은 백제의 고분과 전」이란 제하(題下)의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이 조사기록에 의하면, 이 고분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쇼와(昭和)2년(1927년) 3월 초순 겨울에 얼었던 얼음이 녹을 때 상부(上部)의 석적(石積)과 흙에 틈이 생겨 떨어져 내린 것으로, 그것을 근처의 아이들이 발견하여 현실(玄室) 안의 유물을 꺼내서 고물상 같은 데에 팔아버렸기 때문에 그 출토(出土) 상태가 전혀 판명되지 않았는데, 그 후에 내가 여러 곳에 부탁을 하여 유물의 행방을 수소문한 결과 겨우 제4도(第四圖)에 나타낸 것 정도의 유물을 찾아서 그것을 촬영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고분의 붕괴 당시 제일 처음 현실(玄室) 안에 들어가 (유물을) 실제로 본 15,6세의 조선 아동 최상희라는 자에게서 당시의 유물의 배치를 상세하게 듣고 그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제3도(第三圖)의 좌하(左下)이다.이 고분의 붕괴 후 쇼와2년 9월 중순에 조선총독부에서 좌우의 3기와 그 부근의 송산리(宋山里) 구릉지대에 있는 고분 중의 몇 기를 발굴 조사했다고 하는데,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 씨의 말에 의하면 (고분) 모두가 다 형식은 이 고분과 같은데 이미 도굴을 당해서 중요한 유물은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고 한다.⑭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은 이 보고서에서 명확히 몇 호 분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이 고분은 송산리 제2호분에 해당하는 고분으로,⑮ 도굴된 유물을 가루베가 수소문하여 촬영한 ‘제4도’를 제시하고 있다. 이 사진을 보면 위는 회흑색토기 3점이 나타나 있는데, “연도 입구에 5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이 중 2개는 그 행방을 알 수 없다.”라고 한다. 그리고 아래 사진 “철기는 검, 창, 족, 정, 관의 금구이고, 그 외 옥이 2개 있었다고 하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송산리 제3호분에 대해 가루베는 송산리 1927년 3월에 가루베 자신이 발견하였는데 후에 1927년 10월에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노모리 겐 등이 조사를 하고, 1930년 6월 16일 본인이 다시 충청남도 경찰부의 의뢰로 상세히 조사를 했다고 하며 ‘송산리제3호분 견취도’와 ‘송산리 제3호분 출토의 유물’을 제시하고 있다.⑯송산리 제4호분에 대해 가루베는 옛날에 도굴을 당한 흔적이 있다고 하며 ‘송산리 제4호분 견취도’와 “이곳에서 금동제각추족형구(金銅製角錐鏃形具) 1개, 철제각두병(鐵製角頭鋲) 7개, 목관용목편(木棺用木片) 2개분, 칠기파편(漆器破片) 1개가 발견”되었다고 하며 ‘송산리 제4호분 출토품’ 사진을 제시하고 있다.⑰ 송산리 제4호분에 대한 노모리의 보고에는 도굴공이 있는 곳에서 오사카아사히신문지(大阪朝日新聞紙) 조각과 양초를 발견하였다고 하는 점으로 보아 이를 도굴한 자는 일본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1927년 3월경 지방민의 도굴로 제4호분(보고서 제1호분)으로부터 구옥, 유리옥, 검, 부 등이 출토되어 공주읍내의 일본인이 소지하고 있고, 제3호분(보고서 제2호분)으로부터 금제이식 1대가 발견되어 이것은 현재 교토제국대학의 기요노(淸野) 박사의 소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⑱이상으로 보면 1927년 3월에 이미 송산리고분군은 모두 도굴을 당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가루베가 제시한 송산리 제2호분 ‘제3도’인 유물배치도는 이 고분을 도굴한 15,6세의 최상희라는 자에게서 유물 배치를 상세히 들었다고 하는데, 현실에서 유물을 훔쳐 나오는 자가 유물 배치를 생각하면서 도굴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또 총독부의 정식 조사는 1927년 4월의 1927년 4월 공주군 보승회장의 요청에 의해 1927년 10월에 있었다. 그런데 가루베는 공주군보승회장이 총독부에 발굴요청이 있기도 전에 이미 조사를 끝낸 상태이다. 가루베는 송산리 고분군이 도굴을 알고 있으면서 신고를 하지 않고 몰래 수소문 하여 유물배치도를 작성했으며, 또 당시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이 엄연히 살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루베는 당국에 신고를 하지 않고 조사를 했다. 이는 불법이다. 부산고구려$ 노모리 겐(野守健)의 「공주 송산리고분 조사보고」는 1935년에 발행을 했고, 가루베의 송산리고분 특히 제2호분에 대한 조사 내용을 『고고학잡지』(제20권 제5호)에 발표한 것이 1930년 5월이다. 그런데 노모리의 보고서에는 가루베에 대한 한 마디의 언급이 없다. 또한 가루베가 구체적으로 조사한 송산리 제2호분에 대한 조사 내용도 보이지 않는다. 3. 송산리 제5호분과 제8호분 발굴송산리 제5호분은 1932년 10월 20일 백제왕릉 진입로공사 중 발견하여 이튿날 공주군수의 의뢰를 받아 조사를 했다. 당시 공사감독관 다케우치(竹內)가 내부를 측량하고 가루베가 유물을 들어냈는데 항아리, 순금제장신구, 기타 잔여 유물이 출토되었다.가루베가 완전한 분(墳)이라고 하는 것은 가칭(假稱) 송산리(松山里) 제8호분으로 이 고분은 송산리 제4호분 직하(直下) 10미터 정도의 장소로 제4호분의 배분(陪墳)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오랜 세월 동안 표면이 씻기어져 외관상 고분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1932년 10월 27일 전 백제왕릉(傳 百濟王陵) 제4호분의 참도신설공사(參道新設工事) 중 우연히 발견하여 가루베(輕部)가 직접 발굴하였다.출토유물은 구옥(勾玉) 1개, 이식용금환(耳飾用金環) 1개, 순금제산치옥(純金製山梔玉) 6개, 흑색연편옥(黑色練平玉) 4개, 녹색파리제소옥(綠色玻璃製小玉) 1천여 개, 황색파리제소옥(黃色玻璃製小玉) 약 3백여 개, 소두색파리제소옥(小豆色玻璃製小玉) 36개, 은제엽형장신구(銀製葉形裝身具) 5개, 자감색파리제소옥(紫紺色玻璃製小玉) 약 150여 개, 철정(鐵釘) 약 40개, 감형도기(坩形陶器) 4개, 감형토기(坩形土器) 1개 등으로 기록하고 있으며,⑲ 출토상태의 사진은 그의 저서 ????백제미술(百濟美術)????에 도판(圖版)으로 실려 있다.이 출토유물은 “오랫동안 공주군청에 보존되어 있다가 최근 공주박물관에 보관하여 진열하고 있다”⑳고 하나 무엇이 어떻게 보관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송산리 제8호분 현실 유물출토 상태​1932년 가루베의 발굴 조사로 출현한 백제시대 유물은 공주박물관 건설 기운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㉑ ​4. 가루베의 공주 송산리 제6호분 도굴공주 송산리 제6호분은 1933년에 조사는 되었으나 정식 보고서는 발간되지 않았다. 보고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은 이 고분을 조사한 후에 상부에 신고를 했다. ​송산리고분 배수구(『부산일보』 1935년 10월 24일자)공주에서 왕릉이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총독부박물관에서 조사원을 파견하게 된다. 『매일신보』 1933년 8월 7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공주말엽의 왕도(王都) 공주에서 왕릉 발견속칭 왕릉 가는 도로공사에 종래의 왕릉을 요(遙)히 능시(凌視)할만한 왕릉을 발견함에 이르렀다. 그래서 공사 중의 일동은 탄성을 높이 부르짖게 되는 동시에 후지타(藤田) 본부박물관장을 초래(招來)하여 감정 중에 있는데 종래의 왕릉이 대개 자연석으로 배수구를 설(設)함에 반하여 이 왕릉은 벽돌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벽화조각이 모두 유서 있는 것이므로 일반은 경이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바 박물학자(博物學者)의 감정 결과를 일대 흥미의 눈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부산일보』 1935년 10월 23일자 기사에는 “공주 송산리 제6호분 발견. 8월 1일 공주고보 교유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 발견”이라 하고 “현실은 장방형으로 폭 2.24m, 길이 3.70m로 현실의 중앙으로부터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관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목관을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 또 현실 벽면에는 칠식을 하여 기하학적인 문양을 시(施)하고, 동서남북 벽면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사신 및 일월을 그렸다.”라고 하고 있다. 이 기사는 물론 2년이나 지난 일을 꺼내어 기술하고 있긴 하지만 1933년 8월 1일에 가루베에 의해 발견했다는 것은 그 전에는 어느 누구도 이 고분에 대해 손을 댄 것은 물론이거니와 알지도 못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송산리 제6호분 연도 (『부산일보』 1935년 10월 29일자) 및 연도전벽내면(羨道前壁內面)(『부산일보』 1935년 10월 28일자)오사카 긴다로(大坂金太郞)는, “6호분은 잡초가 심하게 무성하고 외관 구릉으로 생각되는 것으로 도적이 연도(羨道) 천장의 일부를 파괴하여 내부로 침입하여 유물을 도취해 가버렸다. 그 도굴을 최초로 발견한 것은 당시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씨로 동 씨의 보고를 받고 총독부박물관장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동지(同地)에 출장, 가루베(輕部)씨의 협력으로 조사하였다”㉒ 하는데, 후지타와 고이즈미가 많은 유물을 기대했었지만 별 소득 없이 서울로 올라간 후 8월 17일에 세키노의 공주 방문이 있었다. 『매일신보』 1933년 8월 20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공주 신왕릉, 세키노(關野) 박사 내검(來檢) 공주군내에서 진귀한 왕릉을 발견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본부의 초빙에 의하여 동대교수 세키노(關野) 박사가 지난 17일 공주로 와 박식적 감정안으로 모든 것을 조사하는 중이라는데 결과 어떠한 발표가 있을까 함은 일반의 주시 중이라 한다. 세키노의 공주 방문에는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잔뜩 기대를 했다. 그러나 조사가 끝난 후에 세키노가 도착하여 고분의 구조와 축조한 전을 살핀 내용으로,㉓ 이미 유물은 사라져 이에 대한 어떤 특별한 단서는 얻지 못했다.㉔ 고분의 벽면에 창을 만들고 그곳에 불상을 두었을 것이나 도굴당했다고 하는데, 이는 세키노 등의 추측으로 보인다.㉕1933년 8월 9일자 『오사카아사이신문(大阪朝日新聞)』에서는, 1931년 9월에 공주를 방문한 고토 슈이치(後藤守一) 일행이 송산리 제6호분 근처에서 습득한 불상㉖에 대해 “쇼와(昭和) 6년(1931) 9월 도쿄제실박물관 감사관 고토 슈이치(後藤守一) 씨가 현장 아래서 발견한 국보 동조석가여래상이 혹 이 고분에서 당병이 발굴하여 훔쳐 가다가 떨어트린 것”으로 추정하여 이 고분의 1차 도굴을 당병에게 돌리고 있다. 가루베는 송산리 6호분의 존재를 과연 언제 감지했을까? 가루베가 1935년에 『충남향토지』기고한 기록에, “1932년 10월 20일에는 도로공사 중에 발견된 송산리 제5호분의 조사와 함께 석곽내부에 2개의 전축관대(塼築棺臺) 및 연도(羨道)의 입구를 막기 위하여 사용한 전벽(塼壁)의 실례(實例)를 얻었다. 그리고 동년(同年) 10월 26일에는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송산리 제5호분의 서쪽부근에 전축(塼築)의 배수구를 찾아내어 여기에 드디어 제 6호분 발굴의 동기를 만들었던 것이다.”㉗라 하고 있다. 따라서 1932년 10월에 이미 송산리 제6호분의 존재를 감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이 있어, “고적 또는 유물을 발견한 자는 현상(現狀)에 변경을 가함이 없이 3일 이내에 구두 혹은 서면으로 그 지역의 경찰서장에게 신고해야 한다.”하고 이를 어겼을 때에는 처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고도 없었던 것이다.가루베의 행위를 보면, 1932년 10월에 이미 6호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발굴은 그 이듬해 1933년 7월 29일부터 8월 2일까지 단독 발굴을 하고, 후에 총독부에 신고를 하여 고적조사원들과 함께 하였다고 한다.㉘ 그러나 『백제미술』에서는 1933년 7월 하순에 배수구 출구 끝부분에서 봉토(封土)를 제거하기 시작하여 8월 1일에 현실 내에 도달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㉙ 이에 대해서는 가루베가 언제 현실 내에 들어갔는지는 전적으로 가루베의 말 외는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고이즈미(小泉)에 의하면 “1933년 8월 상순 돌연 공주고적보존회장으로부터 전보가 왔는데 벽화고분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하고 조사요원의 급파를 총독부학무국장에게 보내왔다. 연락을 받은 총독부박물관에서는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고적조사원을 주사(主事)로 사와 슌이치(澤俊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등 3명이 파견되어 조사를 담당하였다”고 하며 당시 조사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도착한 깜깜한 실내의 상황이다. 도굴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내부가 깨끗했으며 유물 토기의 조각 잔재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엷은 진흙이 건조된 것 같은 흙 위에는 무수히 많은 발자국들이 있었다. 관대 위의 주변이나 연문서(羨門西) 옆의 벽돌대가 흩어져 있음에도 도굴자가 유물을 찾아다니기보다는 오히려 관대나 현실상(玄室床)의 구조를 조사하려 한 것으로 강하게 추정되었다. 후지타(藤田) 위원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많은 도굴분을 조사해 왔던 우리들도 그것을 짐작했다.최초로 현실내로 부산고구려$ 들어간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씨에게 「유물은 어떻게 된 것일까?」라는 문제를 제기해 보았지만 「당초부터 이 상태이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라고 회답을 했다. 우리가 상상관대상(床上棺台上)의 흐트러진 흙을 정밀조사 해본 결과 관대 위의 흐트러진 벽돌 사이에서 순금제이식(純金製耳飾) 조각과 관대 및 그 주위에 흩어져 있는 파리소옥(玻璃小玉)과 동시에 미세한 조각의 진주옥 다수가 발견되었다. 지금 정확한 개수는 알 수 없지만 모두 합해서 수백 조각 정도이며 옥 조각은 진한 청색, 황색, 붉은 색의 세 가지 색이었다.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진주는 천연진주의 특성인 불정형(不整形)이고 큰 것은 쌀알 크기의 정도의 수 개이며, 그의 반 정도는 쌀알의 3분의 1정도의 크기가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는 어떻게 해서 연결용의 실구멍을 낼 수 있을까하는 작은 것도 포함되어 있다. 지금 아름다운 진주색깔의 화려함을 갖고 있으며 바다에서 생산된 것인지 강에서 생산된 것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이다. 유일한 장신구인 순금제이식(純金製耳飾) 한 개는 길이가 5-6센치 직경이 1.5cm 정도의 가느다란 고리이고 .......운운”㉚ 가루베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한 고이즈미 등의 조사에서도 무뢰한의 도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 이는 가루베가 이미 6호분에 대한 도굴과 아울러 충분한 조사를 하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고이즈미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술하고 있다. 그처럼 온후한 후지타(藤田) 위원님의 얼굴빛을 바꾸며 격노에 찬 언사를 퍼부시는 것은 그전에도 그 후에도 본적이 없다. 그러나 후지타(藤田) 위원님의 질책은 재지(在地)의 관계 유력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 아무런 내색도 않고 설명진에 참가하고 있던 특정인물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 수 있었다.㉛ 그 특정인물이라는 것은 바로 가루베를 지목하는 것이다.㉜ 이런 엄청난 발굴을 조사가 끝난 연후에 신고를 했다는 것은 상식 이하이고 그런 탓에 총독부에서 내려온 조사원은 보고서조차 만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루베가 『충청남도 향토지』에 기고한 기록에도 도판(圖版)으로는 ‘6호분의 연도(羨道)’, ‘백제전(百濟塼)’, ‘벽화 주작도(壁畵 朱雀圖)’, ‘벽화 백호도(壁畵 白虎圖)’는 소개하고 있으나 현실 바닥 사진은 빠져 있다. 그의 기록에 분명히 “유물(遺物)이 비교적 남아 있었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바닥 노출상태를 찍은 사진에도 남아 있었을 것이다. 가루베가 1970년 죽기 전에 쓴 『백제유적의 연구』㉝에도 공주 송산리 6호분의 도판이 12면이 실려 있으나 이곳에도 바닥 노출사진은 제외되어 있다. 그의 모든 기록에서 이 사진만 빠진 것은 그가 이미 유물을 빼돌린 사실이 들어나는 것을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충남향토지』(1935)가루베는 처음부터 송산리 6호분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정으로 사진과 실측도 사진 자료에 일일이 번호를 붙여서 준비했었다. 이러한 자료의 일부는 가루베가 1969년 2월에 전 문화공보부 문화국장을 지낸 이성철에게 우편으로 보내와 밝혀지게 되었다. 가루베가 이성철에게 이 자료를 송부하게 된 것은 이성철이 일제 때 공주고보에서 가루베에게 배운 제자가 되고, 또 이성철이 주일본 한국대사관의 공보관으로 근무할 때 가루베와 각별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자료는 제6호분 발견 당시 현장사진과 일부는 실측도를 찍은 사진으로 28매라고 한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1969년 가루베의 재자인 이성철에게 보낸 사진자료나 『백제유적의 연구』에 나타나 있는 사진에는 6호분의 바닥 즉 관대와 현실의 유물 노출상태를 찍은 그 사진만 유독 빠져있다. 새로 발견되는 유적과 유물을 촬영하면서 가장 중요한 현실의 관대와 유물(도굴되어도 일부 유물은 남아있었을 것임)의 노출상태를 촬영하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㉞ 가루베가 『고고학잡지』에 게재한 논문에도 제6호분이 아닌 다른 조사 고분은 바닥노출 사진이 기본으로 실려 있다. 그런데 송산리 제6호분의 바닥 노출 사진은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그가 끝까지 그의 악행을 철저히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① 野守健, 「公州 松山里 古墳 調査報告」, 『昭和2年度 古蹟調査報告 第2冊』, 1935, pp.2~3.②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총독부박물관 공문서』, 목록 번호: 96-133. ③ 같은 고분을 하나는 ‘송산리’ 다른 하나는 ‘용당리’로 기록한 것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외약리(外若里), 용당리(龍堂里), 박산리(朴山里), 서혈동(西穴洞), 한산리(韓山里), 소정리(小亭里), 송산리(宋山里), 하봉촌(下鳳村)의 일부를 합해 용당리라 하고 주외면에 편입했기 때문에 동명의 혼선이 온 것으로 보인다.④ 정상기, 「일제강점기 공주 송산리고분의 조사」, 『중앙고고연구』 제10호, 2012. ⑤ 「공주 용당리 고분 발굴 조사 복명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총독부박물관 공문서』, 목록 번호: 96-133. ⑥ 정상기, 「일제강점기 공주 송산리고분의 조사」, 『중앙고고연구』 제10호, 2012. ⑦ 野守健, 「公州 松山里 古墳 調査報告」, 『昭和2年度 古蹟調査報告 第2冊』, 1935, p. 15.⑧ 「공주 용당리 고분 발굴 조사 복명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총독부박물관 공문서』, 목록 번호: 96-133. ⑨ 정상기, 「일제강점기 공주 송산리고분의 조사」, 『중앙고고연구』 제10호, 2012. ⑩ 野守健, 「公州 松山里 古墳 調査報告」, 『昭和2年度 古蹟調査報告 第2冊』, 1935. p.19「공주 용당리 고분 발굴 조사 복명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총독부박물관 공문서』, 목록 번호: 96-133. ⑪ [사진] 제2도 공주군 공주읍내 발견 전(塼) (사진 누락), [사진] 제3도 무릉(武陵) (사진 누락), [사진] 제5도 공주군 주외면 용당리 제6호분 현실(玄室) 파괴 상태 (사진 누락), [사진] 제6도 공주군 주외면 용당리 제1호분 (사진 누락), [도면] 제7도 용당리 제1호분 현실(玄室) 실측도 (도면 누락), [사진] 제8도 용당리 제1호분 연도(羨道) (사진 누락) , [사진] 제9도 용당리 제1호분 연도(羨道) 안 구(溝) (사진 누락), [사진] 제10도 용당리 제1호분 연도(羨道) 안 구(溝) (현실玄室 안에서 바라본 모습) (사진 누락) , [사진] 제11도 용당리 제1호분 구(溝)의 단면 (사진 누락), [사진] 제12도 용당리 제1호분 현실(玄室) 동북벽 모퉁이 (사진 누락), [사진] 제13도 용당리 제1호분 현실(玄室) 천정 (사진 누락), [사진] 제14도 용당리 제1호분 발견품 (사진 누락), [사진] 제15도 용당리 제1호분 발견품 (사진 누락), [사진] 제16도 용당리 제2호분 연도(羨道) 폐색석(閉塞石) (현실玄室 안에서 바라본 모습) (사진 누락), [사진] 제17도 용당리 제2호분 발견품 (사진 누락), [사진] 제18도 용당리 제5호분 (사진 누락), [도면] 제19도 용당리 제5호분 현실(玄室) 실측도 (도면 누락), [사진] 제20도 용당리 제5호분 연도(羨道) 폐색(閉塞) 상태 (사진 누락), [사진] 제21도 용당리 제5호분 연도(羨道) 안 구(溝) (사진 누락), [사진] 제22도 용당리 제5호분 연도(羨道) 안 구(溝) (현실玄室 안에서 바라본 모습) (사진 누락) , [사진] 제23도 용당리 제5호분 현실(玄室) 동북벽 모퉁이 (사진 누락), [사진] 제24도 용당리 제5호분 발견품 (사진 누락), [사진] 제25도 용당리 제5호분 발견품 (사진 누락), [사진] 제26도 용당리 제5호분 발견품 (사진 누락)⑫ 「공주 용당리 고분 발굴 조사 복명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총독부박물관 공문서』, 목록 번호: 96-133. ⑬ 輕部慈恩, 「公州に於ける百濟遺蹟」, 『忠南鄕土誌』, 公州公立高等普通學校 校友會, 1935, p.8.輕部慈恩, 「公州に於ける百濟の遺蹟」, 『朝鮮』, 朝鮮總督府, 1934年 11月, p.127.에도 동일한 내용이다.⑭ 輕部慈恩, 「樂浪の影響を受けた百濟の古墳と塼」, 『考古學雜誌』第20卷 第5號, 1930年 5月, pp.48~49. ⑮ 輕部慈恩은 「公州に於けゐ百濟古墳(一)」(『考古學雜誌』 제23권 제7호, 1933년 7월, p.37)에서,“본지 20권 5호에 내가 「樂浪の影響を受けた百濟の古墳と塼」이란 제목으로 송산리의 제2호 고분 조사결과를 보고”라고 쓰고 있다. ⑯ 輕部慈恩, 「公州に於けゐ百濟古墳(四)」, 『考古學雜誌』 제24권 제3호, 부산고구려$ 1934년 3월.⑰ 輕部慈恩, 「公州に於けゐ百濟古墳(四)」, 『考古學雜誌』 제24권 제3호, 1934년 3월.⑱ 「공주 용당리 고분 발굴 조사 복명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총독부박물관 공문서』, 목록 번호: 96-133. ⑲ 輕部慈恩, 「公州に於ける百濟古墳」,『考古學雜誌』24卷 9號, 1934년 9월. ⑳ 經部慈恩, 『百濟美術』, 寶雲舍, 1946, p.131.㉑ 공주보승회의 설립에 대한 협의는 처음 1924년에 나와 1925년 6월에 공주보승회가 성립되었다.(조선총독부, 『조선』 제121호, 휘보’, 1925년 6월) 하지만 진열관과 유물이 없는 상태라 거의 유명무실했다.공주읍에서 산성공원으로 통하는 도로공사를 하던 중 백제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자 공주박물관을 설립하자는 의견들이 나오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백제시대 진귀품 발견박물관 건설의 계획(공주) 공주읍내로부터 백제시대 왕릉에 통하는 자동차 교통도로는 계속하여 개수 중인데 지난 10년 전에 시굴하였다는 고분을 발굴하다가 각종 구슬 등의 진귀한 고물을 발견하였고, 또 그 고분으로부터 50미터 떨어져 있는 지점에서 반괴되어 있는 조그마한 고분을 발견하여 발굴하였던바 또 조그마한 항아리와 팔뚝고리(腕環) 등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학술적으로 상당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공주시민은 전후 2회의 백제유물의 발견과 백제왕성(百濟王城)에 있는 고대인이 거주하던 유적 등을 널리 세상에 소개할 박물관을 건설코자 의논 중이라 한다.(『중앙일보』 1932년 11월 7일자)백제박물관 건설운동 재연, 왕릉의 발견과 유물의 발굴로지난 9월 하순 시외 금성리에서 2기의 왕릉을 발견하고 또 과반 산성공원(백제왕의 城跡) 신도로공사 중 句玉, 기석(基石) 기타 순금장식 등 얻기 어려운 백제시대의 유물을 발굴하였는데 금일까지 경주 등에서 발견된 것은 금속시대의 유물이나 공주의 출토유물은 조선고대문화사상 지대한 발견이다. 지난 월 우에야마(上山) 귀족원의원과 같이 함은 일부러 공주에 둘러 고보 가루베(輕部) 교유의 안내로 동 교유의 수집품과 기타실지 연구를 한 한 결과 그 일품(逸品)에 경탄한바 있었는데 목하 군보승회에서 이러한 등의 출토유물 기타 다수의 귀중한 유물과 같이 세상에 널리 소개코자 시민회의 발기로 백제박물관 건설기성회를 조직하고 그 실현에 맹 운동 중인바 구체적인 계획은 목하 협의 중이오 장소는 도청지를 충당케 될 모양이으로 실현되는 날에는 단연 경주와 어깨를 비기게 될 것이라 한다.(『매일신보』 1932년 11월 9일자)공주에서의 백제시대 유물에 관해서는 가루베의 수집 유물을 빼고는 말할 수가 없다. 공주에서의 박물관 건설은 당연히 가루베가 공주 각지에서 도굴 내지는 채집한 유물들은 단연 미래의 박물관 건설의 주요 진열품으로 삼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은 공산성지(公山城址)에서 “나는 수년간의 지표면 유물채집으로 수다(數多)의 확실한 백제유물을 얻기에 이르렀고,” “다시 1932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유람도로공사 중 약간과 공사 후 빗물에 씻겨 나온 기다(幾多)의 중요한 자료를 채집했다”고 한다. 그 종류는 다종다양하며 그 중 가장 현저한 것으로는 금동제공예품, 와, 전, 도기, 석제기구 등을 들고 있다. 이 같은 그의 수집품을 둘러본 일본 귀족원 의원 우에야마(上山)는 놀라지 않을 없었으며, 공주의 유지들은 가루베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박물관 건설의 기운을 일으키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이후 1934년에는 공주고적보존회가 발족하여 공주 일대에서 발굴한 유물을 모아 전시하고, 1940년 재단법인 공주사적현창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출발을 함과 동시에 박물관 설치에 이르게 된다.㉒ 大坂金太郞, 「百濟壁畵塼室在銘塼に就いて」, 『朝鮮學報 第51輯』, 朝鮮學會, 1969, P.149~150.㉓ 『每日申報』 1933년 8월 20일자에 의하면 關野가 공주에 도착한 것은 8월 17일이다.㉔ 『朝鮮中央日報』 1933년 8월 24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고분을 통해 본 백제시대 문화 삼한시대의 왕국으로서- 현재 충남 부여의 지점을 찬란하게 장식하였던 백제시대의 문화는 천고의 비밀로 비장되어 있던 바 금번 동대 교수 세키노(關野) 박사가 약 1주일 전부터 충남 공주군 주내면에 와서 고분을 발굴함에 의하여 백제시대의 문화가 북중국으로부터 남중국에 이르기까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사실이 이번에 새로 발견되어 지금으로부터 1천6백 년 전의 풍모를 용이히 엿볼 수 있는 동시에 고고학계에 귀중한 공헌 재료를 제공하였다 한다. 이제 세키노 박사가 전기 고분을 발굴하여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고분은 ‘턴넬’을 단면으로 베인 것과 같이 되었는데 내부에는 전부 백색과 흑색의 벽돌로 쌓았고 옆으로는 창을 만들고 그곳에는 불상을 놓게 되어 있었으나 이미 불상은 도굴을 당하고 귀(耳) 장식품과 옥석(玉石) 등만이 발견되었다는 바 채색, 구조 등으로 미루어 보건대 분명히 북경(北京)으로부터 남경(南京)으로 천도한 후 수당시대(隨唐時代)의 고분과 동형으로 이것은 당시 백제와 남중국과의 교역이 얼마나 왕성하였다는 것을 족히 엿볼 수 있는 사실이라 한다. ㉕ 『東亞日報』 1933년 8월 23일자에도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이달에 忠南 公州郡 州內面에서 百濟時代 古墳이 발견되다. 同古墳은 東京帝大發掘調査團에 의하여 발견되었는데 古墳은 턴넬式으로 되어 있고 白 또는 黑色으로 市松모양으로 채색이 되어 있다. 佛像은 盜掘되어 없어지고 裝飾品과 曲玉등의 潰物이 발견되다.㉖ 輕部慈恩의 「公州に於ける百濟古墳」(『考古學雜誌』제26권 제4호, 1936년 4월, p. 20)에 의하면,1931년 9월 22일 도쿄제실박물관 後藤守一 및 矢島正昭, 北原大輔 씨 일행을 안내하여 송산리 고분지대에 이르러 제5호분 서방 약 15m 근처에서 일행이 동조석가상입상(약 7cm) 1구를 우연히 습득했다고 한다.㉗ 輕部慈恩, 「公州に於ける百濟遺蹟」, 『忠淸南道 鄕土誌』, 昭和10年, 公州公立高等普通學校 校友會發行. p.10㉘ 輕部慈恩의 기술에, “昭和8년 7월 29일에 공주보승회의 의뢰를 받아 송산리6호분의 시굴에 들어갔다. 昭和7년 10월 도로공사 중에 노출된 최남단에 있는 배수구에서 차례로 북쪽으로 地山을 남기고 盛土만을 빼고 시행하였다. 그리고 8월 1일 오후에 이르러 약 21미터를 북쪽으로 파 올라가 羨道前壁上部의 끝이 되는 곳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羨道前壁內面 즉 연도 최남단 천정에 닿는 부분을 아래로 파 내려가 직경 30센티 내외의 割石과 섞이어 다수의 문양이 들어간 塼이 출토되었다. 더 파 내려가 약 1미터 정도에 이르자 전과 섞이어 이조말기의 白色釉의 鉢形 도기파편이 나왔기 때문에 이전에 이미 도굴된 것이 명백하여 잠시 실망을 했다. 8월 2일 오후 4시경에 이르러 겨우 槨內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예상외로 내부는 완전히 보존되고 벽화도 있고 佛龕, 棺臺도 있고 유물도 도굴된 편에 비하여 비교적 많이 남아 있어 그 기쁨 중에 경성에 있는 조선총독부박물관에 타전하여 小泉顯夫 씨의 출장을 의뢰하여 공동으로 조사가 시작된 것이다.;유물의 중요한 것은 대부분 도난을 당하고, 琥珀勾玉, 眞珠丸子玉 80여개, 純金製耳飾, 帶金具, 大刀, 刀子破片, 그 외 금동제장신구를 출토했다.”(輕部慈恩, 「公州に於ける百濟遺蹟」『忠淸南道 鄕土誌』, 1935, 公州公立高等普通學校 校友會發行. pp.10~13) ㉙ 經部慈恩, 『百濟美術』, p.117.㉚ 小泉顯夫, 「百濟の舊都夫餘と公州」, 『朝鮮古代遺蹟の遍歷』, 六興出版, 1986, pp.205~206.㉛ 小泉顯夫, 「百濟の舊都夫餘と公州」, 『朝鮮古代遺蹟の遍歷』, 六興出版, 1986, p.201.㉜ 有光敎一, 藤田和夫, 「公州 松山里古墳群의 發掘調査」, 『朝鮮考古硏究會 遺稿Ⅱ』, 도서출판 깊은 샘, 2002. p.5.㉝ 輕部慈恩, 『百濟遺跡の硏究』, 吉川弘文館, 1971.㉞ 정재훈, 「公州 송산리 제6號墳에 대하여」, 文化財12호, 1987, Ⅲ. 가루베가 일본으로 반출한 유물 1. 송산리 제6호분 출토유물의 행방과 아이즈 야이치(會津八一)기념박물관에 들어간 가루베 수집품 후지이 가즈오(藤井和夫)의 논문①에는 와세다대학 문학부 강사였던 아이즈 야이치(會津八一)의 수필을 인용하고 있는데, 아이즈의 수필 내용은 1939년에 발표한 것으로 1935년 7월에 도쿄부(東京府) 나카사구(中野區) 야마토쵸(大和町)에 있는 가루베 지온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날짜는 잊어버렸으나 4,5년 전의 일이다. 충청남도 공주에서 중학교 선생 노릇을 하고 있는 다른 우인이, 자신이 거기서 발견한 백제국왕의 묘에서 파낸 여러 가지 물품을 부산고구려$ 가지고 7월 휴가 때에 돌아왔다. 그걸 보기 위해 야마사구 야마토쵸의 집으로 향했다. 이윽고 발굴자의 설명을 들어가면서 동석한 4,5명은 아주 조용히 수많은 물건들을 보았다. 이 묘는 이미 예전에 한 번 도굴을 당했던 것 같은데 유물은 대부분 작은 금구(金具)의 파편이나 남경옥(南京玉) 등 뿐이었으나, 그래도 그 파편의 도금한 색은 휘황찬란하게 우리들의 눈에 비쳐졌다. 방안 가득히 늘어놓은 파편으로부터 먼 옛날 그 나라 왕궁의 생활을 조용히, 세밀히, 중간 중간 넋을 잃고 마음속에 그려봤다.(1939년 발표) 위 인용문에서 후지이 가즈오(藤井和夫)는 주석을 붙여 “가루베 지온이 아이즈 야이치에게 보여 준 ‘백제 국왕의 무덤에서 파낸 여러 가지 물건’이 1933년 8월에 후지타 료사쿠 등이 발굴한 송산리 제6호분에서 빼내온 것으로 조사 이전에 도굴해 가지고 있었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하고 있다.아이즈 야이치(會津八一)는 가루베의 『백제미술』의 감수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해방 전에 서로 교분이 있었던 것이며, 그의 수집품 중에는 가루베로부터 구입한 유물이 상당 수 포함되어 있다.후지이 가즈오(藤井和夫)가 밝힌 와세다대학의 아이즈 야이치(會津八一)기념박물관 소장품 수집 경위를 보면, 아이즈 야이치의 컬렉션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와전류가 많은데 그 대부분이 가루베 지온이 1930년대에 일본으로 가지고 들어와 매각한 것이라고 한다. 후지이는 1934년 2월 24일에 탈고한 아이즈 야이치의 수필 중 다음 내용을 싣고 있다. 나는 최근에 조선의 어느 방면에서 파편과 함께이기는 하지만 옛 신라시대의 고와를 400개 정도 구입했다. 지금까지 내 수중에 있던 일본이나 중국의 고와 200개를 더하면 600개 정도가 된다. 후지이 가즈오는 여기에 주석을 붙여, “이 당시 구입한 것으로 생각되는 신라와전은 가루베 지온에게서 입수한 것이다. 이 와전에는 채집마다 1~14까지의 한자 숫자가 묵서되어 있는데 채집지가 몇 곳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것 같고, 일부에는 숫자 이외에도 채집자명이 기재되어 있다. 가루베 지온는 아이즈 야이치(會津八一)의 요구에 응해 일시에 대량의 와전을 채집, 사굴했기 때문에 혼란을 피할 목적으로 채집, 사굴지마다 번호를 부여해 분류한 후 아이즈 야이치에게 매각한 것에 아이즈 야이치 등이 주기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한다. 이 한자의 숫자는 출토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이즈 야이치 수장고기물목록(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을 보면 월성, 흥륜사, 천군리, 보문사, 황룡사, 남산, 임해전, 사천왕사, 북군리, 나원사, 분황사, 창림사, 고선사 등지에서 채집한 것이라고 한다. 또 『아이즈 야이치 수장고기물목록』 제6책과 제7책에 따르면 1936년 2월 1일 현재 고구려와전 46점, 백제와전 85점, 신라와전 525점이다. 이 중 상당부분은 1934년에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② 후지이 가즈오는 “일찍이 필자는 아리미츠 교이치로부터 공주 송산리 제29호분의 보고서(有光敎一, 藤井和夫, 2002) 작성 준비 중에 들은 바가 있는데 ‘가루베 지온의 형제가 교토에서 골동점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라고 하면서 그 골동점을 통해서도 매각을 하고 있었다고 전한다”고 한다.③ 가루베는 해방 전에는 그가 도굴 또는 채집한 유물을 수시로 일본으로 반출하여 개인이나 형제가 하는 골동점 등을 통해 매각한 것이다. 2. 도쿄국립박물관에 들어간 가루베 반출 유물 가루베의 「공주에 있어서의 백제고분8」을 보면, 도판 제67도 1 ‘백제 출토의 이식’으로 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또 옥잔(玉盞)이 1점 제시되어 있는데, 제72도로 제시된 ‘백제고분 출토의 옥기’라 하여 “주미리 5호분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현재 도쿄제실박물관 소장으로 있는 이식과 함께 출토”라 하고 있다. 그 설명에는 “현재 도쿄제실박물관소장으로 1930년 가을 주미리 제5호분에서 옥잔(玉盞)과 함께 출토”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④ 주미리 제5호분은 1930년 8월경에 도굴당한 고분으로 1930년 9월에 가루베가 조사하여 잔여 유물을 발견한 것이다.⑤ 이같이 가루베는 고분 출토유물들을 모두 개인 소장으로 하고 일부는 도쿄박물관으로 매각한 것이다. 주미리 출토품은 1932년에 도쿄박물관에 매각한 것이다.⑥​「공주에 있어서의 백제고분8」 도판 제67도 (1)백제고분출토 장신구(상단) 동조석가입상(하단우) 이식(하단좌) 1932년에는 도쿄제실박물관에서 조선, 중국 장식품, 경(鏡)을 포함 18건을 일괄 구입한 건이 있다. 그 중 6건은 조선 공주 발견의 것으로 토기 3점과 금제이식 1점이 포함되어 있다. 토기에는 ‘가루베소장품(輕部所藏品)’이라 첨부되어 있으며 공주발견의 금제이식은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의 “「공주에 있어서 백제고분」에 게재되어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 동시에 가루베는 조선 공주발견 석족 3건을 기증했다고 한다.⑦여기에서 18건을 일괄 구입했다는 것은 한 사람에게서 구입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6건은 공주의 것으로 그 중 토기 3건은 가루베의 것이며, 나머지 3점 중 금제이식은 가루베가 그의 논문에 게재했던 것이다. 이를 미루어 보면 18건 모두 가루베의 수집품으로 추정된다. 「공주에 있어서 백제고분」제72도의 ‘백제고분 출토의 玉盞(玉器)’(『고고학잡지』제26권 4호) 3. 기타 가루베가 반출한 백제유물가루베가 백제유물을 얼마나 많이 수집 또는 도굴을 하였는지 그가 스스로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이 지역의 유적 유적의 조사를 시작한지 8개년, 그간 다행히 많은 백제관계의 고분, 사지, 성지, 궁원지(宮院址) 등 유적을 발견하였다. 또 각종의 백제계통에 속하는 유물을 채집하여 점차 웅진성시대의 백제문화의 윤곽을 밝히기에 이르렀다.⑧ 가루베는 공주부근 백제고분 738기를 가지고 ‘백제고분분포개수표(百濟古墳分布槪數表)’를 만들고, 그 중 182기를 지역별, 유형별로 구분하여 표를 만들고 발견 시일과 상태, 출토유물을 기록하고 있다. 가루베가 고분으로부터 유물을 출토한 고분은 대략 다음과 같다. *가루베가 실측하고 발견한 고분 출토유물⑨지역고분발견 시일출토 유물송산리 고분1호분1927년 3월 5호분1932년 10월 30일 8호분1932년 10월 27일勾玉, 純金製裝身具 등9호분1929년 4월 도굴百濟陶器 3개, 五銖錢, 玉類14호분1927년 5월百濟陶器破片15호분1927년 5월大型百濟陶器16호분1927년 5월1924년경 도굴, 百濟陶器破片 17호분1928년 여름百濟塼 多數18호분1927년 가을百濟陶器 多數19호분1932년 10월百濟三脚陶器 3개교촌리 고분3호분1929년 6월大型百濟陶器우금리 고분1호분1931년 10월 18일1931년 9뤌 도굴, 勾玉, 器玉, 金銅耳飾, 百濟陶器2호분1931년 10월 18일貨泉4호분1931년 10월 18일人骨, 百濟陶器5호분1931년 10월 18일百濟陶器6호분1931년 10월 18일百濟陶器7호분1931년 10월 18일百濟陶器12호분1931년 10월 18일百濟陶器殘缺13호분1931년 10월 18일石製陶器14호분1931년 10월 18일石製15호분1931년 10월 18일石製보통동 고분4호분1931년 9월 23일鐵釘, 鐵製棺用環, 漆器破片19호분1932년 12월百濟陶器殘缺금학리 고분1호분1931년 1월百濟陶器 3점, 2호분1930년 5월百濟陶器坩破片6호분1931년 10월百濟陶器 2개남산록a구 고분1호분1931년 9월木棺金具, 百濟陶器破片2호분1931년 9월百濟陶器4호분1932년 3월百濟陶器남산록구 고분18호분1933년 1월百濟陶器22호분1932년 2월百濟陶器, 鐵製棺金具41호분1931년 11월百濟陶器, 銅器破片 남산록c구 고분24호분1928년 9월百濟陶器破片27호분1928년 10월坩 및 鉢形百濟陶器28호분1928년 4월百濟陶器 3개29호분1931년 4월百濟陶器30호분1931년 4월百濟陶器32호분1932년 4월鉢形百濟陶器주미리 고분2호분1930년 7월百濟陶器殘缺5호분1930년 9월耳飾, 玉器7호분1930년 7월百濟陶器殘缺8호분1930년 7월百濟陶器殘缺12호분1932년 10월百濟陶器릉시 고분3호분1930년 4월百濟陶器殘缺5호분1930년 4월百濟陶器殘缺10호분1930년 10월百濟陶器殘缺20호분1931년 4월百濟陶器, 木棺釘월성산록 고분1호분1931년 4월百濟陶器殘缺5호분1931년 4월百濟陶器주미산록 고분3호분1931년 5월百濟陶器5호분1931년 5월百濟陶器殘缺7호분1931년 5월百濟陶器殘缺 *가루베가 소장했던 유물 품명출토 장소 및 시기출처비고​



​백제식와당, 와편, 기타 유물1928년 3월, 서혈사지『考古學雜誌』19-3⑩ ​







​연화문파와 발견, 4종의 당초와, 문자와 채집1928년 8월, 서혈사지『考古學雜誌』19-3 ​



​각종의 와를 채집남혈사지『考古學雜誌』19-5 보살입상동체남혈사지『考古學雜誌』19-51928년 1월 중순大通銘入瓦웅진출토『考古學雜誌』20-3⑪ 제6도석불 근처에서 발견각종 耳飾백제고분 출토『考古學雜誌』26-4⑫, 第67圖(2) 釜남산고분지대『考古學雜誌』26-4, 第70圖 ​



​金銅製鳳凰形裝飾具공산성지『朝鮮』34-11⑬, 제2도삼비의 서측 50미터金銅製環狀金具 및 銅製蓋形器具공산성지『朝鮮』34-11, 제3도쌍수교에서 동으로 40미터 지점百濟式陶器 2개공산성지『朝鮮』34-11쌍수교에서 동으로 40미터 지점石製器공산성지『朝鮮』34-11 漁用土器 42개공산성지『朝鮮』34-11쌍수교로부터 서쪽 50미터 정도​



​八葉蓮瓣瓦當 2개공산성지『朝鮮』34-11, 제5도쌍수교로부터 서쪽 50미터 정도



百濟陶器 2개공산성지『朝鮮』34-11, 제4도쌍수교로부터 서쪽 50미터 정도토기 1개, 碗形石器 1개,공산성지『朝鮮』34-11쌍수교로부터 서쪽 50미터 정도石棒 1개 공산성지『朝鮮』34-11쌍수교로부터 서쪽 50미터 정도金銅製環狀金具 및 銅製蓋形器具공산성지『朝鮮』34-11쌍수교반으로부터 동으로 약 90미터의 경사면에서 출토塼 1개공산성지『朝鮮』34-11쌍수정 아래에서 채집다수의 전文廟裏山, 교촌리, 외약리충남향토지1927년 3월金銅如來像(높이 7㎝)공주읍 부근에서 출토百濟美術⑭ 金銅挾侍菩薩像(높이 5.7㎝)1930년 부여군 규암면 내리 출토百濟美術, 圖版12 金銅菩薩像(높이 18.2㎝)1931년 가을 공주군 목동면 부근에서 출토百濟美術, 圖版19-1 鐎斗 부산고구려$ 공주공산성 출토百濟美術, 圖版22-3 金銅製鳳凰形把手공주 부근百濟美術, 圖版23 金銅製金具 2점공주 부근百濟美術, 圖版24 百濟裝身具공주 부근百濟美術, 圖版27 百濟陶器坩臺공주 부근百濟美術, 圖版29 百濟陶器공주百濟美術, 圖版31 百濟陶器공주百濟美術, 圖版32 百濟古瓦1932년 대통사지百濟美術, 圖版33 百濟古瓦신원사百濟美術, 圖版34 百濟古瓦 百濟美術, 圖版35-2,3,4 百濟古瓦공주百濟美術, 圖版36 百濟古瓦익산미륵사百濟美術, 圖版37 百濟塼공주百濟美術, 圖版39, 40, 41 百濟瓦부여百濟美術, p107, 圖47-1,2,5,6 百濟瓦공주百濟美術, p107, 圖47-3,4,7,8 百濟瓦공주 대통사지百濟美術, p213, 圖48-1 百濟瓦공주 신영리폐사지百濟美術, p213, 圖48-2 백제 棰先飾瓦공주百濟美術, p220, 圖49-2,4,5,6 古瓦공주 신원사濱田1934,⑮ 圖10-3 古瓦 2점공주 남혈사지濱田1934, 圖10-3 古瓦 2점공주 대통사지濱田1934, 圖10-3 古瓦공주 송산리 동록濱田1934, 圖10-3 古瓦공주산성지濱田1934, 圖10-3 古瓦공주濱田1934, 圖10-3 古瓦舟尾寺址濱田1934, 圖10-3 석족 3건공주 발견『東京博物館圖版目錄』2004⑯1932년 도쿄제실박물관에 매각토기 3점공주 발견『東京博物館圖版目錄』20041932년 도쿄제실박물관에 매각금제이식공주 발견『東京博物館圖版目錄』20041932년 도쿄제실박물관에 매각 ① 「早稻田大學 會津八一博士記念博物館所藏 高句麗瓦塼에 關하여」, 동북아역사재단편,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Ⅳ』, 동북아역사재단, 2011.② 藤井和夫, 朱洪奎, 「早稻田大學 會津八一博士記念博物館所藏 高句麗瓦塼에 關하여」, 동북아역사재단편,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Ⅳ』, 동북아역사재단, 2011.會津八一은 1910년부터 1925년까지 도쿄의 와세다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1926년에 와세다대학 문학부 강사로 동양미술사를 강의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미술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③ 藤井和夫, 朱洪奎, 「早稻田大學 會津八一博士記念博物館所藏 高句麗瓦塼에 關하여」, 동북아역사재단편,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Ⅳ』, 동북아역사재단, 2011.④ 輕部慈恩, 「公州に於ける百濟古墳」, 『考古學雜誌』제26권 제4호, 1936년 4월.⑤ 輕部慈恩, 「公州に於ける百濟古墳」, 『考古學雜誌』제24권 제호, 1936년 4월. p. 26.⑥「東京國立博物館所藏朝鮮産土器·綠釉陶器の收集經緯」(東京國立博物館,『東京國立博物館圖版目錄』, 朝鮮陶磁篇(土器,綠釉陶器), 2004, p. 171)에는 주미리 출토품을 1932년에 동경박물관에 매각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⑦ 「東京國立博物館所藏朝鮮産土器·綠釉陶器の收集經緯」, 東京國立博物館,『東京國立博物館圖版目錄』朝鮮陶磁篇(土器,綠釉陶器), 2004. p. 171.⑧ 輕部慈恩, 「公州に於ける百濟遺蹟」,『忠南鄕土誌』, 公州公立高等普通學校 校友會發行, 1935, p.3.⑨ 輕部慈恩, 「公州に於ける百濟古墳」, 『考古學雜誌』 제23권 제9호, 1933년 9월.輕部慈恩, 「公州に於ける百濟古墳」, 『考古學雜誌』 제24권 제3호, 1934년 3월.⑩ 輕部慈恩, 「百濟の舊都熊津に於ける西穴寺及び南穴寺址」, 『考古學雜誌』 제19권 제3호, 1929년 3월.⑪ 輕部慈恩, 「百濟の舊都熊津發見の百濟式石佛光背に就いて」, 『考古學雜誌』 제20권 3호, 1930년 3월.⑫ 輕部慈恩, 「公州に於ける百濟古墳」, 『考古學雜誌』제26권 제4호, 1936년 4월.⑬ 輕部慈恩, 「公州に於ける百濟の遺蹟」,『朝鮮』朝鮮總督府, 1934년 11월.⑭ 輕部慈恩, ????百濟美術????, 寶雲舍, 1946.⑮ 濱田耕作, 梅原末治, 『新羅古瓦の硏究』, 京都帝國大學, 1934.⑯ 「東京國立博物館所藏朝鮮産土器·綠釉陶器の收集經緯」, 東京國立博物館,『東京國立博物館圖版目錄』朝鮮陶磁篇(土器,綠釉陶器), 2004. Ⅳ. 가루베의 반출 유물에 대한 환수 노력가루베는 1940년 이후에는 대동고등여학교를 거쳐 강경고등여학교에 재직하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그 동안 미쳐 일본으로 내보지 못했던 유물을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